1.샬롬! 한국 교회 130년 역사 가운데 또 한분의 위대한 영적 거장이신 방지일 목사님께서 지난 10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2.우리 한국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며 500여년의 유럽 교회의 역사와 다르게 짧은 기간 폭풍같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남 모르게 헌신한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3.그 중에서도 서양 여자로서 조선사람보다 더 조선사람처럼 살며, 가난한 가람들을 섬기다 본인은 풍토병과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난 서서평 선교사에 대한 일대기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라는 책이 설교를 앞 둔 내 영혼애 깊은 감동을 줍니다. 4.서서평이라는 이름은 독일계 미국 여자 선교사 엘리제 쉐핑이라는 분의 한국식 이름입니다. 의료선교사(간호사)로, 1912년 한국에 입국했을때, 당시 조선에는 2만명이 넘는 나환자들이 있었습니다. 5.서 선교사님은 전라남도 광주를 중심으로 20년 동안 사역하면서, 13명의 고아를 입양해서 자기 딸로 삼았고, 또 한명의 문둥이 자녀를 아들로 삼아 같이 살았습니다. 38명의 과부를 데려다가, 경제적 독립을 하도록 도왔습니다. 전라도와 제주도를 오가며 여전도회를 조직하며 20년 이 땅에 소외된 지역에서 사역하다, 54세에 홀로 세상을 떠납니다. 6.풍토병과 영양실조, 그리고 과로로 세상을 떠나는데, 선교사로 일생을 마감한 그녀를 향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조선사람의 친구가 아니라, 조선사람으로 살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렇게 1934년 6월 26일 새벽4시, 세상을 떠났습니다. 7.동아일보 1934년 6월 28일 신문 사설에서는 그녀의 죽음에 대하여 충격적인 기사를 싣습니다.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광주시민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많은 시민들이 나와서 통곡하고, 특별히 나병환자들이'어머니'를 부르짖으며, 오열한 이유에 대하여 일반 신문이 취재를 했습니다. 8.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난 서성평 선교사를 다른 선교사들은 바보라고도 했습니다. 1912년에 한국에 입국한 이래, 17년 6개월동안 단 한번의 안식년을 가졌다고 합니다. 당시 모든 선교사들이 그랬는가? 아닙니다. 당시에 어떤 선교사들은 마치 재벌처럼, 지역유지처럼 살기도 했습니다. 9.서서평선교사는 자기가 받는 사례비의 절반을 광주 금정교회에 십일조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본인은 된장국에, 찬밥을 물에 말아먹고 주린 배를 채웠습니다. 이런 선교사님의 모습을 다른 선교사들이 어떻게 바라보았을까요? 칭찬했을까요? 아닙니다. 혹평했습니다. 쓸데없는 짓한다 했습니다. 54세에 세상을 떠났을때 그가 남긴 것이 무엇이 있나 찾아가보니, 남자들이 신던 검정 고무신 한켤레, 담요 반조각, 동전 7전, 강냉이 가루 2홉, 그리고 통장 잔고는 제로였습니다. 이것을 보고 다른 선교사들이 깜짝 놀랬습니다. 게다가 남겨진 시신도 대학병원에 기증하고 떠났습니다. 10.그녀의 평생 기도제목은 필요할 때 채우심을 받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 임하실때 이 조선 땅에서 쓰임받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동료 선교사 죤 니스벳이 장례식을 마치고, 그녀의 집에 갔다가 침상 위에 붙은 그녀의 좌우명을 보게 됩니다. 'Not Sucess, But Serve' 11.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삶의 방향은 '성공이 아니라, 섬김입니다' 오늘도 이 한 마디에 영적 도전을 받으며 살아계신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아갑니다. 속초에서 강석훈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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