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 72년 '문천당' 2대 가업으로 속초 역사를 다시 쓰다
사진 1 : 문천당 가게와 방서호 장로 - 원정희 권사 부부
사진 2 : 1958년경 지금은 황소광장 옆 명성칼라 옆 꼬까신 신발가게 건물 자리에 위치해 있던 문천시계점.
결혼예물이 참 중요하던 시절이 있었다. 예물을 어디가서 맞출까 이야기를 하다보면 어김없이 거명되는 곳이 바로 문천당이었다. 많은 속초사람이 그 집 제품은 믿을만 하다고 했다. 문천당 물건은 뭐가 다른지. 어떻게 했길래 사람들한테 좋은 평판을 들을까? 필자도 어르신들 문천당 칭찬을 들으며 오래전부터 궁금했다.
최근 속초시내 여러 가게의 창업일을 순서대로 정리하다 보니, 맨 위에 익숙한 점포 이름이 눈에 띄었다. 바로 문천당이었다. 문천당은 사업자등록증에 1956년 2월 1일이 창업일로 나온다. 67년 전이다. 문천당의 실제 창업일은 사업자등록증에 나오는 것보다 훨씬 앞선다. 문천당 대표 방서호씨는 부친 고 방태형씨가 1951년 10월에 문천당을 창업했다고 밝혔다. 1951년이라면, 바로 그해 5월에 속초지역이 수복되었다. 그러니 올해로 속초 수복 72년과 같이 문천당 창업도 72년을 맞는 셈이다. 문천당은 1963년 시로 승격한 속초시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간직한 가게로 속초의 노포 중의 노포이다.
함남 문천 출신 고 방태형씨 1951년 개업
“아버님 고향은 함경남도 문천입니다. 문천당은 아버님이 고향 지명을 따서 지었어요. 아버님이 언젠가는 고향에 가지 않겠냐는 간절한 마음으로 지은 상호입니다.”
문천당을 창업한 고 방태형씨는 1921년 함경남도 문천군 태생이다. 한 살 때 부모님을 여의고 고아처럼 자랐다. 머슴처럼 힘들게 농사를 짓다가 16살에 큰아버지가 사는 만주로 가서 시계기술을 배웠다. 이후 해방이 되면서 고향 문천 바로 옆 원산에서 시계방을 했다. 그때부터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 하지만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종교 활동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6.25 전쟁이 발발했다.
방태형씨는 1950년 12월 흥남철수 때 배를 타고 피난을 가려고 했는데 그만 배를 놓쳤다. 조카 2명과 함께 두 달 열흘을 걸어서 포항을 거쳐 부산까지 내려갔다. 부산 동아극장 앞에서 시계 수리 좌판을 하다가 시계수리 군속(군무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가을 국군들이 북진해 올 때 같이 속초로 올라와, 지금의 영랑동 1구시장에서 처음 가게 문을 열었다. 그때가 1951년 10월 1일이다. 나중에 중앙시장 근처 지금 가게 근처로 이전했다.
1958년경 문천당 가게 사진에는 ‘문천당’이라는 글자도 작게 보이지만, 큰 간판에는 ‘문천시계점’이라고 적혀 있다. 초창기 문천당은 시계를 주로 취급했다. 1970년까지만 해도 시계는 귀하고 소중한 물건이었다. 방서호씨 본인도 중학교 때 아버지로부터 시계 선물을 처음 받았다고 한다. 1970년 이후 속초가 명태와 오징어 등이 많이 나면서 수산업 경기가 좋아 주민들 소득도 높아지고 귀금속에 대한 관심과 구매가 높아졌다. 그 무렵 상호도 ‘문천당’으로 바뀌었다.
1986년부터 방서호 대표가 가업 이어
“60, 70년대는 속초가 호황기였어요. 전후 사회도 안정되고, 속초에서도 명태와 오징어가 풍어를 이뤘어요. 아버님은 그때부터 직원을 두고 일을 했지요.
아버님 경영 방침은 정직입니다. 항상 정직해야 한다고 저에게도 말씀하셨어요. 금 제품은 순도가 중요합니다. 아버지는 분석을 많이 했어요. 순도를 높이기 위해 염산과 질산을 섞어서 만든 왕수에 금을 녹여 불순물을 걸러내고 순금을 뽑아내는 과정을 분석이라 합니다. 방독면도 없던 시절 숯불에서 분석작업을 했어요. 그런 고단한 과정과 철저한 품질관리는 고객과 신뢰를 쌓게 했지요. 그렇게 소문이 나면서 금을 사거나, 팔거나 할 때 문천당에 가야 하는 것이 공식처럼 됐어요. 강릉, 동해 등 영동지역까지도 문천당을 알아주었어요.”
방서호 대표는 4남매 중 외아들이다. 1957년생으로 올해 나이 66세이다. 지난 1986년부터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지금까지 문천당을 운영하고 있다. 방 대표는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무역회사를 다녔다. 서울에서 직장생활 할 때는 속초에 다시 내려와 살 거라는 생각을 안 했다. 1980년대 당시는 국내 경기도 좋았고, 무역회사 일도 재미있었다. ‘무역부국’이라고 해서 해외 무역 활동이 활발할 때였다.
1986년 방 대표는 부친으로부터 “몸이 좋지 않으니, 속초로 내려오면 좋겠다”라는 연락을 받았다. 고민이 많았다. 이미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까지 다니고 있는데, 모든 걸 정리하고 내려오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부친이 문천당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걸 알기에 방 대표는 속초로 내려오기로 결심했다. 부친이 혈혈단신 실향민으로 남한 땅에 내려와 고달프고 힘들게 지금까지 살아오신 걸 옆에서 쭉 지켜봤다. 이제는 좀 쉬게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방 대표가 속초로 내려와 문천당 일을 시작한 지 2년만인 1988년에 부친 방태형씨는 돌아가셨다. 주일만 빼고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쉬지 않고 일하느라 미처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못했다. 방 대표는 지금도 부친이 너무 빨리 돌아가신 게 안타깝다.
“가업을 잇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저도 한 눈 팔지 않고 집사람과 같이 열심히 오랜 세월 같이 달려왔습니다. 문천당 72년 역사의 절반은 아버지, 나머지 반은 아버지가 이뤄온 것을 제가 지키면서 여기까지 왔어요. 1986년 제가 처음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금은세공 기사 전해천씨와 시계 수리기사 양종문씨 두 사람과 같이 일을 해오고 있습니다. 30년이 넘었지요. 그 사람들 덕에 문천당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봐야지요.”
부친 유지 받들어 속초시에 장학금 기탁
고 방태형씨는 속초 최초의 장로교회인 중앙교회 창립 멤버이다. 기독교계에서는 함경도 쪽은 장로교를 중심으로, 강원도는 감리교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이 이뤄졌다. 함경도 출신인 방태형씨도 장로교인이었다. 처음 속초에 와서는 장로교회가 없어 감리교회를 다녔다. 1952년 11월 9일 실향민들이 주축이 되어 속초 최초의 장로교회인 속초중앙교회를 창립했다. 월남 실향민들이 창립한 중앙교회는 속초의 실향민 종교공동체로서 큰 역할을 해 왔다. 지난 2022년 속초중앙교회는 창립 70주년을 맞았다. 방태형씨는 종교 활동 외에도 어려운 실향민도 많이 도와주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잃고 유년시절을 힘들게 보낸 방태형씨는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도와주기도 했다.
“아버님은 흥남에서 포항을 거쳐 부산까지 두 달 열흘을 걸어서 피난길을 갔지요. 그런데 피난길에서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전쟁 중에 노숙을 한 적이 없었다고 해요. 특히 고성 천진에서는 어느 할머니집 부뚜막에서 신세를 진 적이 있는데, 할머니가 도루메기를 해줬는데 그 맛을 잊지 못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아버님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은혜를 베풀어 준 고마운 사람들에게 늘 감사해 했어요.”
방서호 대표는 아버지 기일 20주기인 2008년에는 5천만원을, 30주기인 2018년에는 2천만원을 속초시에 향토장학금으로 기탁했다. 아버님의 유지를 받드는 의미도 있고, 속초시민이 문천당에 쏟아주신 사랑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다. 방 대표는 “속초시민들이 베풀어주신 사랑으로 70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문천당을 유지해 올 수 있었다”라고 감사의 뜻을 밝혔다.
함남 문천군 출신 실향민 고 방태형은 끝내 귀향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아들 방서호는 부친의 실향의 아픔을 뛰어넘어 자신의 고향 속초에서 2대에 걸친 가업으로 속초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1970년대 실향민의 도시 속초에서는 고향심기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속초에서 성공한 실향민들이 대부분 대도시로 떠나기에 지역경제에 윤기가 돌지 않는다고 했다. 그만큼 열악한 환경에서 지역에 터 잡고 기업활동을 오랫동안 지속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남들이 이루지 못한 문천당의 72년은 더욱 빛나는 역사이다. 속초 수복 72년에 문천당 창업 72년. 작은 가게 문천당의 역사가 곧 속초의 역사가 되었다.
엄경선 전문기자
2023년 11월 14일
출처 : 설악신문 (http://soraknews.co.kr/detail.php?number=27232&thread=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