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할렐루야! 속초의 봄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특이합니다. 한 낮에는 기온이 25도를 넘어서 한여름의 따가운 햇살과 다름없이 눈부십니다. 하지만 한 밤중에는 기온이 10도 아래로 뚝 떨어져서 한기를 느낄 정도로 쌀쌀합니다. 그리고 아침 저녁으로 부는 바람 때문에 그늘에 있으면만 있으면 시원합니다. 2.요즘은 설악산 자락이 온통 신록으로 인해 푸르름이 더해가고 있으며, 들에는 이름 모를 꽃들로 인해 형형색색 아름다운 색으로 가득합니다. 긴 겨울이 지나고 설악산에 쌓였던 눈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신록의 푸르름이 새롭게만 여겨집니다. 3.지난 목요일과 금요일 이틀 동안 전라남도 증도로 국내순교지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전라남도 신안군 앞 바다에는 크고 작은 섬들이 많습니다. 신안군 앞바다에만 1004개의 섬이 있다해서, '천사의 섬'이라고도 불립니다. 그런데 그 많은 섬들 가운데 '증도'라는 섬이 우리 한국교회 기독교역사에 있어서는 아주 특별한 곳이기도 합니다. 4.증도라는 섬의 전체 인구가 2천명 정도인데, 지역주민 전체의 90%가 기독교인일 정도로 전국에서 복음화율이 가장 높은 곳입니다. 국내 최대 천일염을 생산하는 염전으로 유명한데요, 기독교의 영향으로 섬 전체가 금연섬으로 지정될 정도로 특이한 섬입니다. 5.2015년 기준 전국 복음화율은 19.72%인데요, 정확하게 대한민국을 동서로 나누어 볼때 강원도 17.53%, 경상북도 13.32%, 경상남도 10.45%로 복음화율이 평균보다 낮습니다. 하지만 서울 경기를 비롯해서 충남, 전북, 전주의 복음화율을 평균 23%에 이를 정도로 대단합니다. 6.그 중에서도 전라남도의 복음화율은 23.21%인데요, 그 중에서도 신안군 전체의 복음화율은 35%가 넘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신안군의 복음화율이 높은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문준경 전도사'라는 순교자가 계셨기 때문입니다. 문준경 전도사님은 1891년, 전라남도 신안의 여러 섬들 가운데 하나인 임태도라는 곳에서 문 진사집 세째 딸로 자라났습니다. 나이 17살 때였던 1908년, 증도 전체에서 가장 큰 지주였던 정운삼의 삼남 정근태라는 남자와 혼인을 하게 됩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이 양가 부모님끼리 혼인 약속을 해서 시집을 갔습니다. 7.하지만 이 정근태란 사람은 이미 다른 여자와 살고 있었기 때문에, 17살 문준경과는 형식적인 결혼만 하고, 인근 임자도란 섬으로 도망가 살았습니다. 결국 문준경은 '정근태'와 결혼함과 동시에 남편과 떨어져 '생과부'처럼 살면서 혼자 시부모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시아버지의 격려로 모진 시집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20년 가까이 홀로 시부모님을 모시다가, 1927년 시아버지께서 별세하시면서 증도에서 목포로 나와 홀로 삯바느질을 하며 살았습니다. 일제 시대때 참 어려운 시절을 혼자 살아야 했습니다. 8.그러던 1927년 목포 북교동교회에 출석하게 되면서 복음을 알게 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그 이듬해인 1928년에 세례를 받게 됩니다. 이후 당대 유명한 부흥사였던 이성봉 목사님의 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전도인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1931년 경성성서학원에 청강생으로 입학하여 전도사가 됩니다. 당시 전도사는 3개월 공부하고, 나머지 9개월은 전도지에 나가서 전도활동을 하였는데, 남편이 다른 여자와 살고 있던 임자도를 찾아가서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합니다. 그 때 세워진 교회가 '임자진리교회'입니다. 9.문준경 전도사는 섬과 섬 사이의 갯벌을 맨발로 다니면서,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워나갔습니다. 1934년에는 후증도에 '증동리교회'를 세우고, 36넌에는 '대초리교회'를 세우고, 재원리, 방축리, 우전리에 기도처를 세웠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해방을 맞이하고, 1950년 6.25 전쟁을 경험하게 됩니다. 10.이 과정에서 공산당에 의해 목포 정치보위부로 끌려가 조사를 받던 중 풀려났다. 그러나 증도로 돌아가면 공산당원들에 의해 다시 붙잡힐 것이 뻔해서 이성봉 목사님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끝내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면서, 그날 밤에 이판일 장로와 함께 섬으로 돌아갔습니다. 11.바로 그 다음날인 10월 5일 새벽, 문준경 전도사는 중동리 백사장에서 공산당원들에 의해 무차별 폭행을 당한 후, 죽창으로 온 몸이 찔려 피를 흘리고, 결국에는 총살을 당해 순교하시고 말았습니다. 당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백정희전도사와 교인들의 증언으로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 역사가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12.특별히 문준경 전도사의 전도로 예수 믿고 장로가 된 이판일 장로는 일가족 13명을 비롯해 임자진리교회 성도 48명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중에 급습한 지역 공산당원들에 의해 개펄로 끌려가 죽창과 몽둥이에 맞아 48명이 한꺼번에 순교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이때 마침 이판일 장로의 장남이었던 이인재는 목포에 있어서 화를 면했는데, 후에 해군과 함께 상륙한 후에 전쟁 중에 자기 아버지를 비롯한 교인들을 전부 죽인 지역공산당원들이 체포되어, 이들에 대해 사형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이인재는 가족들의 시신을 끌어안고 피눈물을 흘렸던 아픔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사람도 죽이지 말아달라고 요청해 모두 사면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13.얼마든지 보복처형을 할 수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원수도 가슴으로 품고,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역사가 일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문준경 전도사 한 사람이 증인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참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이제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죽는 날까지 순교자의 삶으로,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 나아가는 그 한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속초에서 강석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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