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뉴스 신년인터뷰] 탐험가 남영호 “자기 뜻만 고집하면 그건 팀이 아니다” ⊙ 1만8000km 유라시아 대륙 자전거 횡단… 세계 10대 사막 무동력 횡단 도전 ⊙ “탐험,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연구이자 이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 ⊙ 30대 나이에 본격 탐험의 길로… “내 안의 ‘탐험 DNA’ 발견” ⊙ 비상식량 있으면서도 더 달라던 호주 대원… 가난해서 고기 못 내줬다고 엉엉 울던 쿠르드 여성 ⊙ “자연 경험하는 교육 필요… 탐험 경험 활용할 수 있는 방법 고민” 南瑛浩 1977년생 중앙대 예술대학 졸업 2006 유라시아 대륙 횡단 1만8000km 2009 타클라마칸 사막 450km 종단 2010 갠지스 강 2500km 종주 2011 고비 사막 1600km 횡단 2012 그레이트빅토리아 사막 1400km 횡단 2013 룹알할리 사막(아라비안 사막 엠티쿼터) 1000km 횡단 2013 그레이트베이슨 사막 700km 횡단 2014 그레이트샌디 사막&깁슨 사막 1670km 횡단 2014 알타이 산맥&고비 사막 2400km 횡단 2015 치와와 사막 1200km 종단 2016 파타고니아 종단 3500km <사진1>지난 2014년 몽골 고비 사막 횡단길에 오른 남영호 대장. 사진=남영호 호리호리하지만 단단한 체구였다. 내일모레 쉰을 앞둔 사람의 몸처럼 보이지 않았다. 꾸준한 운동으로 건강관리를 한 덕분일 터다. 탐험가 남영호 대장과 만나 악수할 때 든 첫인상이다. 남 대장은 “최근엔 운동을 열심히 하지 않았다”며 웃었지만 딱 달라붙는 폴라티셔츠 라인 위로 어깨와 팔 근육이 선명하게 보였다. 강원도 영월 출신인 남 대장은 극지 탐험가로 알려져 있다. 중앙대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산악 전문지에서 사진기자로 활동하다가 2006년 유라시아 대륙 1만8000km를 자전거로 횡단하면서 탐험가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이어 2009년 타클라마칸 사막 도보 종단, 2010년 갠지스 강을 트레킹과 래프팅, 카약만으로 탐사하는 무동력 완주를 마쳤다. 2011년부터는 고비 사막을 시작으로 세계 10대 사막을 도보와 자전거만을 이용해 무동력 횡단하는 도전을 하고 있다. 30대 나이에 본격적인 탐험가의 삶을 시작한 이래 남 대장 곁엔 늘 ‘개척자 정신’이란 말이 따라붙었다. 현재 그는 가족과 함께 강원도 속초에서 지내고 있다. 고향 영월군의 홍보대사도 맡고 있다. 지난 12월 2일 만난 남 대장은 젊은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자신의 탐험 경험을 소개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그는 지금껏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걸어온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매 원정은 목숨을 건 도전이었다. 1만8000km 유라시아 대륙 횡단 ―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30대 나이에 탐험가의 길로 뛰어들었습니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사진기자로 일하며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던 것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사진을 전공한 이유도 사진으로 돈을 벌기보단 제 기록의 도구로 다루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입니다. 기록의 대상을 막연히 자연으로 생각했죠. 산을 타는 등 여러 아웃도어 활동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제 안에 있던 ‘탐험 DNA’를 발견했습니다. 노르웨이 탐험가 아문센이 1911년 남극점을 인류 처음으로 밟았다고 해서 지금 그곳을 탐험하는 게 의미 없지 않잖아요? 21세기에 존재하는 지금의 모습도 100년 후에는 과거가 될 것이고요. 그때부터 우리가 밟은 이 땅의 지금 모습을 기록하고 싶다고 결심했죠.” ― 그런 결심을 하고서 처음으로 간 곳은 어디였나요? “1만8000km 유라시아 대륙 횡단이었습니다. 자전거로 횡단했죠. 1년간 준비했고, 횡단에는 8개월이 걸렸어요.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중국 톈진에서 출발해 포르투갈까지 달렸습니다. 강도 건너고 사막도 건너고 산도 넘었죠. 또 유교 문화권에서부터 이슬람 문화권, 기독교 문화권까지 두루 거쳤습니다.” ― 1년간 어떤 준비를 했나요? “먼저 공모를 통해 함께 횡단에 나설 팀원을 모집했습니다. 대략 20~30명 정도가 모였습니다.” ― 꽤 많이 모였네요? “네. 이들과 자전거를 타고 서울에서 미시령을 넘어 속초도 갔다 오고, 서울에서 대전을 찍고 오고 부단히 훈련했죠. 그런데 한 번씩 훈련 나갈 때마다 팀원 절반씩은 떨어져 나가더라고요(웃음). 결국 유라시아 횡단엔 저를 포함해 5명이 출발했죠. 이마저도 여행 중간에 줄어들어 최종 목적지엔 저 포함 2명이 도착했습니다.” ― 생업을 포기하고 유라시아 횡단 길에 올랐을 텐데 후회나 두려움은 없었나요? “전혀요. 제 삶을 한국에 묶어둘 만큼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도전하지 않는 게 인생을 망치는 거라고 느꼈죠. 직장 생활은 언제든지 다시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반대로 더 일찍 시작하지 않았다고 후회하지도 않습니다.” ― 왜 그렇게 생각하나요? “다 때가 있는 것 같아요. 뭐든지 끓는 혈기로만 되는 일은 없습니다. 세상에 대한 경험치도 어느 정도 쌓이고 자기 인생에 대한 확신도 생겼을 때 비로소 도전할 수 있는 때가 오는 것 같습니다.” “혜초는 뼛속까지 탐험가” ― 가진 탐험 기록이 많습니다. 그중 갠지스 강 카약 일주, 아라비안 사막 엠티쿼터 도보 횡단, 치와와 사막 무동력 종단은 ‘세계 최초’로 이룬 업적인데요. “사실 세계 최초로 세계 10대 사막을 횡단하겠다고 마음먹은 건, 이미 다른 누군가 남극점이나 북극점에 가봤고, 히말라야 14봉에 올랐기 때문이었어요. 하지만 ‘세계 최초’라는 말을 어느 순간부터 잘 안 쓰게 됐습니다. 첫째로는 ‘세계 최초’라는 말이 과연 사실인지 의문이 들었고요, 둘째로 누군가에게 보여주기식 기록은 의미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탐험과 도전을 통해 스스로 떳떳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큽니다.” ― 그럼 의미가 큰 여정이 있다면요? “2010년 갠지스 강 카약 일주요. 1977년 뉴질랜드의 탐험가 에드먼드 힐러리가 이끄는 탐험대가 갠지스 강의 원류를 찾기 위해 제트 보트를 이용해 강을 거슬러 올라간 적이 있어요. 그런데 상류로 올라갈수록 강폭이 좁아지고 물살이 거칠어지다 보니 보트가 뒤집히는 등 어려움이 컸죠. 결국 보트에서 내려 육로를 통해 갠지스 강 원류로 추정되는 곳에 다다랐죠. 저는 카약을 타고 노를 저어 갠지스 강을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어려움이 컸지만 결국 갠지스 강 전 구간 일주에 성공했죠.” ― 2009년 타클라마칸 사막 종단 당시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이 커다란 동기부여가 됐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시 혜초 스님은 당나라로 유학 갔던 구법승이잖아요. 그런데 이 책을 읽다 보면 혜초가 직분만 승려지 뼛속까지 탐험가라는 걸 알 수 있어요. 혜초는 지금의 이란 동부에서 와칸 회랑을 따라 아프가니스탄을 거쳤고 이후 파미르 고원을 넘어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 도시 쿠차에 다다랐죠. 이후 사막을 건너 장안에 도착했습니다. 그 행보가 너무나 흥미로웠어요. 타클라마칸 사막을 종단한 이유도 혜초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왕오천축국전》은 신라 성덕대왕 시기 신라의 승려 혜초가 인도의 5국(五國) 부근 여러 나라를 순례하고 그 행적을 기록한 여행기다. 혜초는 723년부터 727년까지 4년간 인도와 중앙아시아, 아랍 지역을 여행했다. 《왕오천축국전》은 세계 4대 여행기로 손꼽히며,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여행기다. 당시 중국과 인도 사이 여행길과 교역로를 아는 데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비공개로 보관돼 있다. 먼저 떠나간 호주 대원 <사진2> 고비 사막을 걷고 있는 남영호 대장. 사막의 고운 모래결 위에 그의 발자국이 짙게 남았다. 사진=남영호 ― 탐험 중 겪었던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나요? “네. 죽을 뻔했던 일이 있었어요. 2014년 호주 그레이트 샌디 사막과 깁슨 사막을 여행할 때 일입니다.” ― 어떤 일이 있었나요. “저와 호주인 대원, 미국인 대원 총 3명이 팀을 이뤄 떠났습니다. 호주인 대원은 온라인 탐험 커뮤니티에서 만난 친구였고 미국인 대원은 한국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던 친구였어요. 사막용 자전거를 타고 횡단했습니다. 저희가 이용한 길은 1년에 1~2명이 지나갈까 말까 하는 길이었어요. 호주 아웃백(미개척지)을 개척하던 시대에 광산의 물자를 나르기 위해 닦아놓은 좁은 길이었죠. 하루에 80km씩 가기로 계획을 세웠어요. 사막 횡단의 경우 아주 치밀한 계획을 세워 하루하루 내 컨디션과 물자를 배분해야 합니다. 한번 들어가면 횡단을 마치지 않는 이상 끝낼 수 없는 여정이니까요. 사막 중간에서 여정을 포기한다는 건 곧 죽겠다는 뜻입니다. 물도 귀하니 하루치 물과 음식도 치밀하게 계획해 놓아야 하죠. 그런데 이 서양 친구들이 피지컬도 좋다 보니 의욕이 넘치더라고요.” ― 앞서가겠다고 하던가요? “네. 호주인 대원이 ‘캡틴, 난 컨디션이 좋으니 먼저 가겠다’고 하더군요. 저는 절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자기 뜻에 따라 맘대로 행동하면 그건 팀이 아니라고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제 말을 듣지 않고 먼저 가버렸습니다. 반면 미국인 대원은 컨디션 난조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를 두고 가지 말라고 울기까지 했습니다. 걱정하지 말라고, 우린 팀이라고 다독였습니다.” ― 그래서 어찌 됐나요? “하루는 이 미국인 대원이 고인 물웅덩이를 찾더니 필터가 달린 정수기를 갖고 그대로 그 물을 퍼담기 시작했습니다. 탐험가들은 정수기를 갖고 다니는데요, 이 정수기에는 촘촘한 필터가 있어서 오염된 물을 일부 정화해 줍니다. 하지만 물 위에 뜬 부유물을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정수기에 넣게 되면 고장이 나요. 그런데 이 대원이 급한 나머지 부유물까지 정수기에 넣어버렸어요. 결국 정수기가 망가져 쓸 수 없게 돼버렸죠.” ― 이 정도면 횡단을 포기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하는 수 없이 구조팀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위성전화와 개인조난위치발신기(PLB)를 갖고 있었거든요. 문제는 저희가 있던 위치가 차로 접근이 안 되는 곳이었습니다. 구조팀이 비행기를 보내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다음 날 아침에 비행기가 온다고 해서 아침부터 불을 피워 연기를 냈습니다. 저희를 발견한 비행기와 통신을 했는데 착륙이 불가하다고 하더군요. 대신 비상식량과 물, 예비용 위성전화가 담긴 구조 박스를 떨어뜨려 줬습니다. 결국 이것들을 이용해 스스로 살아 나와야 했죠.” 청구 비용 2억8000만원 ― 먼저 떠난 호주인 대원은 어떻게 됐습니까? “비행기 쪽에 얘기했죠. ‘너네 자국민(호주인)이 우리보다 먼저 떠났다. 위험한 상태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보다 많이 앞서나가진 못했을 거다’라고 알려줬어요. 한 1시간쯤 뒤에 연락이 오더라고요. 찾았다고요. 그 대원에게도 구조 박스를 내려줬다고 했습니다. 또 대원이 어디 있는지 GPS 좌표를 보내줬어요. 아니나 다를까 저희가 있던 곳에서 불과 30km 정도밖에 더 가지 못했더라고요.” ― 찾으러 갔습니까? “네. 가는 길에 보니 이 대원이 쓴 편지가 있더라고요. 자신은 누구이고, 어느 쪽으로 가고 있는지, 현재 죽어가고 있다고 적혀 있었어요. 이 대원이 남긴 자전거 바퀴 자국을 보니 한 번도 쉰 흔적이 없었어요. 오버페이스 한 거죠.” ― 대원을 찾았나요? “네. 살이 쪽 빠지고 정신이 나간 것 같았어요. 다행히 살아 있었죠. 물어보니 자기 소변을 마시면서 버텼대요. 그러며 비상식량을 달라고 하는데, 저희도 넉넉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각자 몫 중 일부를 떼어 나눠줬죠. 그렇게 다시 힘을 모아 사막을 빠져나왔고 무사히 숙소에 도착했어요. 그런데 다음 날 리셉션에서 저한테 팩스가 왔다고 내려와 보라고 하더군요.” ― 어떤 팩스였나요? “구조 비용 청구서였습니다. 우리 돈으로 2억8000만원 정도 나왔더라고요. 비행기 전세비, 구조대원 인건비 등을 합한 금액이었죠. 청구서를 보니 헛웃음만 나오더라고요. 수중에 그 정도 돈이 있다면 고민도 없을 텐데, 팀원과 의논했죠. ‘우리가 사막에서 살아 나온 것은 기적이다. 죽고 싶은 사람 없지 않았나. 내가 대장이니 10만 달러를 내겠다. 나머지는 너희 둘이 나눠 냈으면 한다’고 말했죠.” ― 반응이 어떻던가요? “미국인 대원은 잠잠히 듣고 있었고 혼자 떠났던 호주 대원은 싫다고 했어요. ‘당신이 캡틴이니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우선 그렇게 회의를 마치고 방에서 짐을 정리하는데 이 호주인 대원 가방에서 남은 비상식량과 물이 나오더군요. 저희 둘에게 조르다시피 식량을 나눠달라고 했으면서…. 그런데도 이렇게 뻔뻔하게 나오니 화가 치밀어 오르더군요.” ― 어떻게 했나요? “호주 공영방송인 ABC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인터뷰 자리에서 ‘너희 국민을 살리기 위해 우리가 이렇게나 노력했다. 나 혼자 살고자 했다면 구조 요청 같은 건 안 해도 됐고 비상식량 역시 나눠주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도덕적으로는 지탄받겠지만 누구에게나 사는 건 중요하기 때문이다. 최후의 방법으로 SOS 요청을 했는데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 하니 막막하다. 내게 호주에서 일할 수 있는 노동 비자를 달라. 일해서 그 돈을 다 갚고 가겠다’라는 식으로 얘기했어요.” ― 호주 측 반응이 있었나요? “관계 기관 몇 곳이 나눠서 그 금액을 내겠다고 하더라고요. 그 덕분에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죠. 사막 횡단엔 성공했지만 기쁨은 하나도 느끼지 못했던 도전이었어요. 대원과 소통하는 방법은 무엇이고 진정한 리더십은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낀 경험이었습니다.” “칼라하리 사막, 빠르게 포기한 건 잘한 선택” <사진3>남영호 대장이 지난 2013년 도보횡단에 성공한 아라비안 사막 엠티쿼터의 모습. 사진=남영호 ― 탐험 중간에 포기한 적도 있나요? “물론 있습니다. 2015년에 떠났던 칼라하리 사막에서였죠. 탐험 시작 일주일 만에 접고 나왔습니다. 칼라하리는 일반적인 사막과 환경이 달랐어요. 풀숲도 많고 무엇보다 야생 동물이 너무 많더군요. 사자, 하이에나가 지나다니는데 실제로 보면 그 크기가 어마어마합니다. 더구나 당시 제 컨디션도 좋지 않았죠. 지금 생각해 봐도 빠르게 포기한 건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 빈곤, 전쟁, 기후 변화 등은 현재 전 지구적 문제로 꼽히는데요, 탐험 중 이를 실제 체감한 적도 있나요? “그럼요. 많이 볼 수밖에 없죠. 튀르키예 지역을 여행할 때였어요. 튀르키예 동부에 있는 반 호수 밑으로는 여행자가 거의 없거든요. 이 지역엔 쿠르드인이 많이 삽니다. 윅세코바라는 지역을 지날 때였어요. 한 쿠르드인 양치기와 친해져 그 집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외국에서 손님이 왔다고 하니 온 동네 사람이 모여들었어요. 잔치가 열렸죠. 밥을 다 먹고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집에 왔는데 이 양치기 친구 누나가 엉엉 우는 거예요.” ― 잔칫날인데 왜 울던가요? “이분이 이날 음식을 준비했는데 집이 가난해 고기를 못 내어줘 그게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울고 있다 하더라고요.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정말 짠했어요.” ― 일부 쿠르드인은 튀르키예 정부를 상대로 무장 독립 투쟁을 하기도 합니다. 머문 지역이 위험한 동네는 아니었나요? “동네 사람들이 저한테 한국 고유 무술을 가르쳐달라고 하더라고요.” ― 태권도 말인가요? “네. 그래서 ‘왜 그걸 배우고 싶어?’ 물어보니 ‘싸워서 이겨야 하거든’이라고 답해요. 그러면서 PKK(쿠르디스탄 노동자당)의 무장 투쟁 활동 사진을 막 보여주더군요. 저에겐 잠자리와 음식을 내어준 고마운 사람들이지만, 한편으론 하루하루 목숨 걸고 투쟁하는 사람들이었어요.” ‘직업 말고, 어떻게 살고 싶어?’ ― 한 아웃도어 용품 기업 소속으로 탐험 활동을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탐험할 때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든든한 후원자가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죠. 필요한 장비와 비용을 어느 정도 지원해 주니까요. 소속사 계약 이전까진 대부분 자비로 다녔습니다. 모집한 대원들에게도 참가비를 내라고 하지 않았죠. 그런데 그게 참 쉽지 않더라고요. 유럽이나 미국 같은 아웃도어 선진국과 달리 한국에선 탐험가에 대한 대우도 그리 넉넉하지 않았죠. 한계가 온 시점에 마침 제 탐험이 다큐멘터리로 제작되고 일간지에 보도도 됐죠.” ― 이를 계기로 소속사 측에서 연락이 온 건가요? “네. 좋은 기회로 한 기업과 계약하게 됐어요. 감사한 마음이 컸죠. 하지만 그 편안한 환경에 익숙해지기 싫더라고요. 돈을 받았으니 떠나야 한다는 식의 책임감 때문에 탐험을 하는 건…. 저는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것에 도전하는 사람입니다. 일상에서의 내 모습조차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익에 이끌려 제 진짜 모습을 포기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았죠.” ― 20여 년간 전문 탐험가로 살아왔습니다. 다른 길을 선택할 걸 하고 후회한 적은 없나요? “다른 일을 했다면 지금보다 돈을 더 많이 벌었을 수 있겠죠. 하지만 물질적 여유로움과 정신적 여유로움이 같이 가는 건 아니거든요. 비록 물질적 여유로움은 조금 부족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가치들을 가족과 나누고 있다고 생각해요.” ― 자녀 교육관이 궁금합니다. ‘공부 열심히 해라’ 같은 말은 덜 할 것 같습니다. “네. 저는 항상 아이들에게 ‘어떻게 살고 싶어?’라고 물어봅니다. 아이들은 보통 직업을 얘기하죠. 그럼 저는 이렇게 되묻습니다. ‘직업 말고, 어떻게 살고 싶어?’라고요. 아이들은 헷갈려하죠. 그런데 커가면서 조금씩 이 말뜻을 이해하는 것 같아요.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을 보면서 이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다고 고민하는 것 같아요. 아이들이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탐험 통해 얻은 경험 나눌 줄 알아야” <사진4>남영호 대장이 남미 파타고니아 빙하를 헤치며 카약 노를 젓고 있다. 사진=남영호 ― 탐험 활동을 하지 않을 땐 보통 무슨 일을 하면서 지내나요? “사실 탐험을 안 한 지가 6년 가까이 됐습니다. 원고를 쓰기도 하고, 탐험에서 얻은 경험을 주제로 강연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자그마한 사업도 하고 있고요.” ― 최근 여행 유튜버들이 일반인이 쉽게 가보지 못한 곳을 방문해 그곳을 소개하는 영상을 찍어 올리고 있습니다. 이전까진 오지로 여겨지던 곳이 이제는 친근한 관광지로 인식되곤 합니다. 이를 어떻게 보고 있나요? “아주 좋게 보고 있습니다. 전 세계 다양한 곳을 찾아 현지 사람들을 만나고 그곳 문화를 체험하고 이를 알리는 건 유튜브의 순기능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조회수를 올리기 위해 여행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위험한 곳에 가는 건 우려스럽습니다. 북중(北中) 접경 지역에 몰래 들어가 중국인인 척하다 걸리거나 위험한 소수민족이 사는 곳을 무턱대고 방문한 영상을 보고 있으면 걱정스러워요.” ― 취미로 탐험을 즐기는 것에서 나아가 전문 탐험가가 되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합니까. “먼저 탐험을 왜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답을 할 수 있어야 해요. 단순히 ‘여기 가고 싶다’ 식의 대답이면 곤란하죠. 제가 한창 활동할 시기엔 메일이 정말 많이 왔어요. 대부분 젊은이였는데 자기도 데리고 가달라는 문의였죠. 누구나 초보 시절이 있으니 같이 갈 기회를 만들려고 노력했었죠. 하지만 대부분 일회성 체험에 그치더라고요. 그만큼 이 일을 진지하게 대할 수 있는 결심이 서야 해요.” ― 탐험을 콘텐츠로 만들어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것도 탐험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탐험을 통해 얻은 경험과 스토리를 여러 사람과 나눌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오지 어딘가에 태극기 꽂고 돌아가는 게 목적이 아니잖아요. ‘세계 최초’ 같은 기록을 세우는 것도 주목적이 돼선 안 돼요. 탐험을 통해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다음 세대에게 내 이야기를 전하며 영감을 불어넣고, 이를 바탕으로 도전 정신을 심어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코리아 둘레길 프로젝트 계획 남영호 대장은 오는 3~4월을 목표로 ‘코리아 둘레길’ 종주를 계획하고 있다. 코리아 둘레길은 그 길이만 4500km에 이르는 길로 우리나라 최장거리 걷기 여행길로 꼽힌다. 2009년 시작해 2016년 완성된 50개 코스 750km의 동해 해파랑길, 2020년 선보인 90개 코스 1470km의 남해 남파랑길, 2022년 만들어진 109개 코스 1800km의 서해 서해랑길에 이어 지난 9월 완공된 35개 코스 510km의 DMZ평화의길로 구성된다. ― 코리아 둘레길을 걷는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단순히 빠르게, 오래 걷는 것이 아닌 지역사회와 협업을 해보고자 합니다. 가령 유명인사를 초청해 같이 걸으며 해당 지역을 알린다거나 인문학자를 초청해 함께 걷고 길에 얽힌 서사를 나눠보거나 하는 식으로요. 이를 통해 우리 길, 우리 땅을 다시 보고 ‘우리다움’의 중요성을 알리려고 합니다.” ― 우리다움이요? “네. 예컨대 강원도가 강원도답고, 경상도가 경상도답고, 경기도가 경기도다운 매력이 있어야 해요. 그런데 한국의 유명 관광지를 보면 죄다 ‘한국의 산티아고’ ‘한국의 나폴리’ 등으로 표현되죠. 오히려 세계에 내놓기엔 콘텐츠 내실이 부족하니까 이런 별칭을 이용하는 것 아닐까요? 보전해야 할 것들을 찾아내 지역을 브랜드화해야지, 특정 지역을 따라가려다 보면 각 도시, 각 지역이 가진 매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죠.” 속초 해변 가득 메운 쓰레기 ― 앞으로 계속 사막 등 극지 탐험 도전을 이어나갈 계획입니까? “50세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오지로 떠나 부딪쳐보고 싶은 욕심은 여전히 있어요. 저보다 어린 대원들과 함께 탐험하면서 제가 가진 경험을 나눠줄 수도 있고요. 하지만 너무 거기에 연연하고 싶진 않아요. 제 경험을 좀 더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어요. 특히 우리 교육계에 하고 싶은 말이 많아요.” ― 어떤 말이요? “산과 들을 거닐며 자연을 경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우리 교육 시스템 안에 녹아들어야 한다고 봐요. 요즘 아이들은 벌레를 보면 징그럽다고만 하지 벌레가 우리 삶에 왜 필요한지, 지구 생태계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잘 모르죠. 인간도 자연의 일부인데 자연을 이해하지 못하고 전자기기에만 빠져 있어요. 선진국의 경우엔 청소년기에 이런 교육을 많이 받습니다. 정치권에 있는 분들이 이 부분을 고민해 줬으면 좋겠어요.” ― 아이들이 자연을 접할 기회가 많아야 하는데 자연은 점점 파괴되고 오염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답답할 것 같습니다. “네. 속초에 살며 플로깅(plogging·조깅을 하면서 쓰레기를 줍는 운동)을 자주 하는데요, 이때 거둬들이는 쓰레기양이 엄청납니다. 어구(漁具) 같은 것도 있지만, 대부분이 관광객이 생각 없이 버리고 간 것들이에요. 일회용 커피 컵, 폭죽 쓰레기, 담배꽁초나 담뱃갑이 주를 이뤄요. 특히 폭죽은 다 쏘고 나면 뾰족한 철사가 남는데 이걸 모래밭에 그대로 버리고 가니 위험하죠. 맨발로 해변 산책을 즐기는 누군가가 다칠 수도 있죠. 2시간만 청소해도 50리터 쓰레기봉투 2개를 가득 채웁니다.” ― 문제가 심각하네요. “네. 개발도상국을 여행하다 보면 환경오염 상태가 심각한 걸 알 수 있는데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보여요. 이 역시 근본적으로는 자연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생긴 문제라고 봅니다.” ― 탐험이 갖고 있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제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연구이자 이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대단한 사람이 아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많이 흔들려보고, 상처도 받아보고요.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은 아닐지언정 나와 눈을 마주치고 나와 손을 맞잡은 이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탐험 과정에서 고비를 극복하고 교훈을 얻어가면서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출처 : 월간조선 2025년 신년호(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E&nNewsNumb=202501100034) 글 : 김세윤 월간조선 기자 gasout@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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