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전통 소중히 하며 세상을 변혁시키기 위해 헌신한 신학자" 평가, 세계교회 애도 '희망의 신학자'로 불리며 20세기 큰 족적을 남긴 신학계의 거장 위르겐 몰트만 교수가 지난 3일(현지시간) 98세 일기로 별세했다. 몰트만은 2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적 배경 위에서 '희망의 신학'을 주창한 인물로, 20세기 가장 중요한 개신교 신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몰트만은 1926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출생해 2차 세계대전 당시 만 18세의 나이로 독일군에 징집됐다. 당시 그가 복무했던 부대는 영국군의 고모라 작전에 의해 군인과 시민 등 약 4만 명이 불타 죽는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이 과정에서 몰트만은 사망한 친구들의 시체를 목격하며 괴로움 가운데 실존적 고민을 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그의 신학 여정에 시발점이 됐다. 1948년 포로생활에서 석방된 후 몰트만은 고향으로 돌아와 괴팅겐대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에 과학자가 되고자 했던 그가 신학을 선택하게 된 것은 '고난'과 '신정'에 관한 실존적 물음 때문이었다. 이러한 경험에서 출발한 그의 신학은 1964년 발표한 '희망의 신학'을 통해 첫 열매를 맺었다. 몰트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약속의 관점에서 조망하고, 종말론을 기독교 신학의 핵심으로 위치시켰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하나님에 의해 행해진 종말의 선취이자 우리를 위한 약속의 사건으로 이해했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의 사건을 일으키심으로 자신의 약속을 보증하셨으며, 모든 실재의 새창조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셨다. 그렇기에 부활의 선포는 곧 희망의 선포가 된다. 이를 통해 몰트만은 종말론을 현실 도피적 종말론이 아닌, 현실 개혁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실천적 종말론으로 전개했다. 실천적인 그의 신학은 에큐메니칼 운동과 환경운동, 그리고 한국교회에까지 신학적 영향을 미쳤다. 몰트만은 세계교회협의회(WCC)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 위원회의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스웨덴에서 열린 WCC 제4차 웁살라 총회 때도 참여하는 등 교회일치를 위한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한국의 민중신학자들과 더불어 보수신학자들과도 신학적 교류를 이어오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분단국가인 한국사회를 이해하고 통일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는 등 한국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기도 했다. 김명용 교수(장신대 전 총장), 김균진 교수(연세대 명예), 김도훈 교수(장신대), 배경식 교수(한일장신대 명예) 등 여러 명의 한국인 제자를 길러냈고, 장신대와 서울신대, 한신대 등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몰트만의 제자인 김도훈 교수는 그에 대해 "성경과 전통을 소중히 하면서도 동시에 현실의 문제를 도외시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답변하고자 했던 신학자였다"며 "성경과 교회를 사랑하고, 세상을 복음으로 변혁시키기 위해 헌신했던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어 김 교수는 "예리함을 가진 학자였지만 동시에 옆집 할아버지처럼 친근하면서 아주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의 성품처럼 신학 역시 약자와 창조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소망 기쁨 사랑을 강조하는 따뜻한 신학이었다"라고 말했다. 몰트만은 1952년 괴팅겐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목사로 사역을 이어가다가 1958년 부퍼탈신학대학교에서 교수로 기독교교리사를 가르쳤다. 이후 1963년 본대학교로 초빙돼 1967년까지 조직신학과 기독교사회윤리를 강의하다가 그해 에른스트 케제만의 주선으로 튀빙겐대학교의 초빙을 받아 1994년 정년 퇴임할 때까지 그곳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했다. 몰트만 교수는 평생 500여 권이 넘는 저서를 남겼는데, 주요저서로는 '희망의 신학(1964)',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1972)',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1975)' 등이 있다. 김동현 기자 kdhyeon@pckworld.com 2024년 06월 05일(수) 14:34 출처 : 한국기독공보(https://pckworld.com/article.php?aid=1026002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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