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지난 19세기 말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국적으로 꽃 피우게 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바로 우리들의 어머니의 어머니이셨습니다. 2.역사 자료에 의하면 1890년대에 평양 널다리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분 가운데 ‘이신행’이라는 여자분이 계셨습니다. 이 분이 예수 믿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조선 땅에서 여자로 태어났다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살아가면서도 사랑받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노예로 살아갈 운명이었는데,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립니다. 조선 땅의 여자들도 예수 믿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3.그래서 이신행 여사님이 전도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전도를 해서 예수 믿게 된 분들과 함께 힘을 다해 전도하기 시작하는데, 나중에는 아주 조직적으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여자들이 모여 1898년에 ‘여전도회’를 조직하게 되는데, 이것이 최초의 여전도회가 됩니다. 4.그런데요, 이 널다리교회 여전도회 회원들이 얼마나 열심히 전도를 했던지 1899년에는 교회가 크게 부흥해서, 당시 성도들의 헌금 5천원과 선교사 보조금 수천원을 더해, 72칸짜리 교회당을 세우고, 그 이름을 장대현교회라고 바꾸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평양을 중심으로 탄포리교회, 청산포교회, 태평 외리교회, 중화 읍내교회 등 서북지역에 많은 교회를 세우게 되는데요, 이때에도 여전도회의 역할이 대단했습니다. 5.여전도회 회원들 대부분이 넉넉하지 못한 가정 형편에서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봉헌을 했습니다. 돈은 없어도 하루 한끼 밥이라도 먹을 수 있다면, 밥을 짓을 때마다 쌀을 한 두 줌씩 따로 모아 성미로 드렸습니다. 그것도 없는 이들은 자기 시간의 십일조를 드려 날연보라는 것을 했습니다. 교회와서 기도하고, 청소하고, 허드렛일이라도 하며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6.이런 여전도회의 헌신을 보고, 전국의 모든 교회들이 여전도회를 세우게 됩니다. 각 지역마다 여전도회가 연합하기 시작하는데요, 처음 여전도회가 생긴 지 30년 만인 1928년에 드디어 전국 11개 지방 여전도회 연합회가 한 자리에 모여, ‘전국여전도회연합회’를 세우게 됩니다. 이것이 전국여전도회연합회의 역사입니다. 그런데요 1928년에 세워진 전국여전도회연합회가 어떤 일을 했는지 아세요? 제일 먼저 이들이 결정한 것은 ‘해외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이었습니다. 7.그래서 2년 후인 제2회 여전도회총회에서 중국 산동성으로 여자선교사 한명을 파송하기로 결의를 하고, 구체적으로 모금 활동을 하기 시작하는데요, 그 해에 전국여전도회에서 헌금한 금액이 무려 520원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시세로는 금 한돈이 2원이었다고 하니, 오늘날의 시세로 계산하면, 금 한돈에 25만원으로 환산해보면, 약 6천 5백만원 정도되는 모금을 한 겁니다. 8.그리고 전국여전도회연합회는 그 이듬해인 1931년 교단 총회에서 드디어 우리나라 최초로 중국 산동성에 있는 래양지역으로 파송할 여자선교사를 최종 선발하고 파송하게 됩니다. 그런데요 우리 교회의 역사를 보면 김순호 선교사의 이름이 희미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냥 여전도회에서 파송한 최초의 여자 선교사로만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제가 확인해보니까 김순호 선교사님은 정말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제가 볼 때에는 에스더와 같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9.김순호 선교사는 1902년 황해도 재령에 있는 재령동부교회 김두한 장로님의 딸로 태어나셨습니다. 재령에는 명신학교라는 기독교학교가 있었는데, 거기를 졸업하고 난 후에 서울에 있는 정신학교를 가서 공부를 하고, 1921년에 제13회 졸업생이 됩니다. 이후 평양여자신학교를 졸업한 후에 황해도 신천에 있는 경신학교와 함경북도 성진에 있는 보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고향인 동부재령교회로 돌아와 전도사 생활을 합니다. 그러다가 전국여전도회연합회에서 ‘중국산동성에 파송할 총회파송 1호 여자 선교사’를 파송하기 위해 선교사를 모집하는 기독신보 광고를 보게 됩니다. 자격조건은 ‘중등 이상의 학교를 졸업하고, 신학을 공부한 자로 모집 당시 교역에 종사하며 연령은 만 25세에서 30세이며 충분한 사역 경험이 있는 여자’였습니다. 10.마치 김순호를 선교사로 선발하기 위한 공고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김순호는 이 조건에 완전하게 맞는 준비된 여자 사역자였습니다. 김순호 선교사는 처음 선교사로 파송된 이후 3년간 중국의 래양, 북경에서 중국어 공부에 먼저 집중한 후에 본격적인 선교사역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총회 회의록에 의하면 ‘김순호 선교사가 방문한 교회 중 두 교회에서 큰 부흥이 일어났다’고 하며, 당시 김순호 선교사와 함께 산동성 선교사로 활동했던 방지일 목사님의 증언에 의하면 ‘중국어가 유창해서 중국어로 중국 여성들을 가르치는데 뛰어났고, 김순호 선교사가 말씀을 전하면 회개의 영이 임해 회중이 통회자복하는 일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11.특별히 1936년 안식년으로 귀국을 했을 때 교회사에 남을 만한 중요한 한 가지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총회 여전도회주일 제정과 관련된 일이었습니다. 당시 여전도회전국연합회의 회장은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선생이셨습니다. 김마리아 회장께서는 1935년 우리 교단 제24회 총회에서 ‘한국교회에서 여전도회의 수고를 기억해주시고 선교여성의 꿈을 심어주기 위해 여전도회주일을 제정해달라’는 청원을 했던 겁니다. 그러나 총회에 참석한 총대들 대부분이 남성들이었고, 여성들의 수고를 이해하지 못하고, 청원건을 부결시켜 버리고 말았던 겁니다. 12.1936년은 이렇게 여전도회 주일 제정이 부결된 바로 다음 해였습니다. 김마리아 회장은 이번에도 한국교회가 여전도회주일을 지키게 해달라는 청원을 했는데, 이번에도 총회에서 가결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요, 여전도회에서 후원하고, 총회에서 파송한 최초의 여자 선교사, 김순호 선교사가 총회에서 선교보고를 하게 된 겁니다. 13.총회에 참석한 모든 분들이 김순호 선교사님의 선교 보고를 들으면서, 엄청난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여자 혼자 중국 산동성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했을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났는지를 생생하게 전하면서, 여전도회가 얼마나 귀한 사역을 하고 있는지를 역설했는데요, 그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1936년 제25회 총회에서 감동 받은 총대들이 여전도회주일 제정을 허락했고, 이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총회는 매년 1월 셋째 주일을 여전도회주일로 지키며, 여전도회의 사명이 선교에 있음으로 다시금 생각하며, 헌신하는 계기가 된 겁니다. 14.김순호 선교사님은 이후에 산동성 사역을 마치고, 귀국하셔서 해방 때까지 평양여자신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력하셨습니다. 그리고 6.25 전쟁 중이었던 1951년, 신의주 제2교회를 섬기시다가, 새벽기도 중 몰려든 폭도들에 의해 안타깝게도 49세를 일기로 순교를 하셨던 겁니다. 끝까지 교회를 지키다 순교한 김순호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15.그러나 오늘 여전도회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한국교회가 오늘날과 같이 부흥하기까지 그 뒤에는 말없이 섬기며 헌신했던 여전도회 회원들이 있었음을 기억하며, 오늘 우리도 ‘김순호 선교사’처럼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선교 여성으로 사명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2021년 1월 17일 여전도회주일 설교 중에서... 속초중앙교회 강석훈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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